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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깽 꼬레아노 (하) 세대를 잇는 사람들] 잊혀졌던 '한국의 얼' 되살린다

# 한국의 얼 스승 삼아 춤 배운 마리아 우리 한인들에게는 너무 흔하다고 말할 수 있는 한국 문화. 언제 한번 스스로 감격해서 한복을 입고 풍물 장단에 어깨춤을 쳐보았을까. 서구화의 매서운 바람 속에서 한인들은 잊어버린 한국 전통을 멕시칸 코리안 후손으로서 이를 잇는 사람이 있다. 메리다 시내 한인 이민 박물관에서 한국 무용을 가르치는 마리아 에오제니아 올센 아길라르(34)씨. 프로그레소에서 만난 루이스 올란 올센 리(62)씨의 큰 딸인 마리아는 전문 무용수다. 그가 이끌고 있는 댄스 그룹 이름이 ‘무궁화(Mugunghwa)’다. 영어로 연예 그룹 이름이나 상호를 짓는 한국 사람들에게는 촌스러움의 극치라고도 할 수 있다. 마리아의 한국 사랑의 뿌리가 순수하고 깊음을 느낄 수 있다. 더욱 놀랄 사실은 그 녀는 한국 춤을 혼자 배웠다. 2006년 한인 이민 박물관 한 켠에 보관된 장고, 북을 들고 하나씩 가락을 익혀 나갔다. 유투브(Youtube) 인터넷에 오른 부채춤, 장고춤 등 한국무용 비디오를 보고 춤사위 하나씩을 반복하길 몇년. 마리아의 한국 춤은 이미 문외한이 보더라도 수준급이다. 손끝 하나 춤사위 하나 하나가 한국의 프로 무용수 같다. 춤을 마치고 손을 모아 엎드려 절 하는 모습도 천연 한국 사람이다. 코리안 멕시칸으로서 마리아의 외모와 대조되어 그녀의 춤은 더욱 마음을 움직인다. 마리아씨는 “멕시코 춤은 즐겁고 경쾌한 반면 한국 춤은 고차원적이어서 마음으로 느끼고 표출해야 한다”고 설명한다. 또한 ‘한국 춤은 자연과 내가 조화를 이루는 춤’이라고 한다. 스승이 없는 그녀는 자기의 느낌 그대로를 말할 뿐이다. 뿌리는 역시 그녀의 부친과 할머니 이솔명(1907~1995)씨다. 마리아씨는 “할머니가 하나, 둘, 셋...한국 숫자 세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며 “한국 음식을 함께 먹으며 ‘이것은 뭐다’ 이름을 익혔다”고 말했다. 자신의 할머니와 증조부 사진이 걸려 있는 이민 박물관에서의 그녀는 한 개인이 아니라 한인 이민사의 한 부분으로 승화했다. 어린 10대 학생들이 들어왔다. 그녀에게 한국 고전 무용을 배우기 위해서다. 이 중에는 이민 5,6세대 후손들도 있고 친구 따라서 온 멕시칸 소녀들도 있다. 마리아는 코리안 멕시칸 4세대 후손일 뿐만 아니라 한국 문화를 남미에서 전하는 매개 역할을 하고 있다. “아리랑 가락을 통해 한국의 얼을 느꼈다”는 마리아씨에게 ‘한국의 피’가 흐르고 있음을 느끼는 것이 기자 뿐만은 아닐 게다. # 한인 이민사 직접 찾아 나선 후예도 메리다 시청 홍보실장을 맡고 있는 야비에르 코로나 배자(Lic.Javier A. Corona Baeza·34)씨는 한인 이민 4세로서 자신의 직계 조상은 물론이고 한인 멕시코 이민사를 연구중이다. 홍보실 일을 하면서 만난 여러가지 모습의 한인 후손들도 많다.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의 활동 근거지인 치아파스 정글에 거주하는 김씨 성을 가진 50대 여성, 멕시코 한인 이민자의 후예로서 온두라스 혁명군 활동을 한 후손 이모씨도 만났다. 코로나는 한국 성 고씨에서 온 멕시칸 성. 코로나 배자씨는 기존에 나온 몇몇 한인 이민사에 대해서 불만도 토로했다. 조상들의 실상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일부 종교에 편중되거나 사료만 나열한 수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직접 나섰다. 최근 그는 ‘애니깽, 그것은 전설, 역사와 문화’란 소책자를 발간했다. 스패니시와 영어로 된 이 책자를 통해 코로나 배자씨는 초기 한인 이민자들의 삶의 실상을 조금이나마 그대로 밝히고자 노력했다. 그는 이것을 위해 한인들 보다 일찍 도착해 애니깽 노동자로 일한 레바논 이민자들의 스토리도 연구했다. 코로나 배자씨는 “많은 멕시칸들이 당시 이민 온 한인들과 후손들의 근면 성실함을 존중한다”며 “나도 조상들의 이같은 노력과 헌신을 존경한다”고 말한다. 그는 할아버지 아마도 코로나 김(1911~작고)씨로부터 김치, 국수, 만두, 전병, 불고기 등의 음식을 배웠다고 말한다. 그의 증조부모는 1905년 이민온 고희민씨와 김순희씨다. 부친은 1952년생인 아마도 코로나 디애스씨다. 결혼해 딸을 둔 그의 가족은 벌써 이민 5세대가 되었지만 한국과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앞으로 기회가 되면 한인 후손회장을 맡아 역사를 복원하는 일을 하고 싶다”고도 한다. 이들에게 한국과 한국 문화는 무엇일까. 이미 한국말은 잊은지 오래고 한글도 거의 읽지 못하는 이들은 왜 애니깽 노동자로 머나먼 타향에 온 자신들의 조상을 잊지 않고 계속 살려 나가는 것일까. 그 답은 ‘100% 한인이자 100% 멕시칸’이라 할 수 있는 이번 취재 코디네이터 엄호용(45·메리다 거주)씨가 했다. #설명하기 어려운 ‘얼’이 이유 지난 1977년에 11세때 부모의 손을 잡고 남미의 파라과이로 이민을 간 엄씨는 1986년 멕시코시티로 대학에 진학하면서 지금까지 26년간의 멕시코 인연을 시작했다. 그동안 한인사회와 멕시코 사회 속에서 수많은 일들을 하면서 그는 앞에 말한 대로 꼭 어느 쪽이라고 말하기 어려운 사람이 됐다. 그의 부인 베로니카 크레스포(48)씨는 멕시칸 마야 여성이다. 엄씨에게 실례되는 일이었지만 그녀에게 물었다. “남편의 스패니시에 액센트가 있죠?” 그녀의 답은 “없다”였다. 엄씨의 스패니시 실력이 의심스러웠던 것은 아니었고 그가 얼마나 멕시칸 사회의 일부로 살았나를 확인하고 싶었다. 또한 초기 멕시칸 이민자들이 수십년 동안 코리안 멕시칸으로서 살면서 엄씨와 같은 완벽한 이중언어자가 됐을 상황도 궁금했다. 그런 엄씨가 ‘액센트 없는’ 한국말로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만난 많은 코리안 멕시칸들은 다양한 부류가 있지만 한가지 공통점은 ‘한국의 얼’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나도 그 얼이 정확하게 무어라고 말하기 어렵다. 분명한 것은 부모, 조부모한테 배웠다는 것이다. 나도 부모한테 이어 받았다. 한인 이민자로서 또 멕시칸(그는 아직도 한국 국적이다)으로서 살면서 이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지만 답을 할 수가 없었다.” 메리다에 한글 학교가 처음 세워졌을 때 초대 교장을 맡을 정도로 한글과 한국 문화 전수에 열정이었던 엄씨는 한동안 한인 후손회와 한글 한교에 발을 들여 놓지 않았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자기가 할 일을 다했다는 판단도 작용했다. 엄씨는 기자와 함께 ‘한국 춤꾼’ 마리아씨를 만나면서 마음이 바뀐 것 같다. 엄씨는 “다시 한글 학교에 가서 코리안 멕시칸 후손들에게 한국의 얼이 무엇인지를 함께 이야기할 기회를 가져야 겠다”고 말했다. 정제되지는 않지만 마음 속 한 켠에 이들에게 꼭 해주어야 할 말이 생각난 것이다. 마리아, 코로나 배자, 엄씨 등 이들은 세대와 세대, 한국과 멕시코를 연결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한인으로서의 혈통은 희석되고 벌써 100년이 넘은 이민 역사 속에서 문화적으로 물질적으로 많은 것이 혼재됐지만, 지금도 이들의 피와 영혼 속에 간직된 것이 있다. 바로 ‘한국의 얼’이다. 우리는 미주에서 이를 되살리고 있는가? 되물을 수 밖에 없었다. 멕시코 메리다=송훈정 기자 통 역: 엄호용 도움: 유남열 선교사

2012-03-06

[애니깽 꼬레아노 (상) 나는 한인 후예] 이민 107년…우리에겐 '한인의 피' 흐른다

멕시코 유카탄주 메리다(Merida) 지역은 최근 빠르게 도시화가 진행되고 있다. 없던 건물과 고가도로가 생겨났고 인구도 크게 늘었다. 멕시코 시티를 비롯한 북부 지역에서 마약 갱단들이 설치고 치안이 불안해지면서 최근 이 곳으로 이주하는 사람도 많아졌다. 상대적으로 안전하다고 하지만 곳곳에 무장 경찰이 근무를 서고 있다. 메리다시와 주변 교외를 연결하는 주요 도로에도 경찰들이 즐비하다. 한인들도 많이 찾는 국제 관광지 캔쿤으로부터 서쪽으로 약 190마일 떨어진 이 곳은 마야 문명의 대표적 유적 ‘치첸이사(Chichen Itza)’ 신전 등이 지금도 위엄을 떨치고 있다. 대한제국의 국운이 다해가고 있을 때였던 지난 1905년 4월4일 인천 제물포에서 남녀노소 조선인 1033명이 새로운 삶을 찾아 이름도 들어보지 못했던 타국으로 향했다. 이들이 한 달 넘게 배(일포드호)를 타고 멕시코에 도착해 정착한 곳이 바로 메리다다. 우리 증조부모 뻘 되는 이들의 멕시코 도착은 미국 하와이(1902년 12월말 제물포서 출발)에 이어 머나먼 이국에서의 또 하나의 웅대한 ‘애니깽’ 한인 이민사를 쓰게했다. 지난 2005년 멕시코 이민 100주년을 맞아 한국 정부와 민간이 함께 나서 나름 성대하게 기념 행사를 벌였던 이 곳을 다시 찾았다. 이민 1세대는 물론이고 2세대까지도 대부분 작고한 지금, 손주뻘인 3세대가 이미 장년층이 됐고, 4세, 5세대, 심지어 6세대까지 한인 후예들이 이어져온 이곳. 이들은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미주에 거주하는 우리 자녀와 후손들이 앞으로 50년, 100년 뒤 그들의 조상인 ‘나’를 어떻게 생각하며 또 어떤 삶을 살고 있을지를 알기 위해서도 그들의 삶이 궁금했다. # 김치·고추장으로 전통 계승 유카탄주 문화 유적지 관리를 총괄하고 있는 라몬 리 레혼(Ramon G. Lee Rejon·1958년생 53세·사진)씨를 메리다 시내 컨벤센 센터 주 문화부 사무실에서 만났다. 부친과 증조부 모두 멕시칸 여성과 결혼했기 때문에 그는 이미 외모상으로는 멕시칸이다. 한인 사회가 상대적으로 큰 미주 이민 사회에서는 한인끼리의 결혼이 많아 세대가 내려가도 외모상으로는 확연한 아시안, 한인들이 많지만 여기는 그렇지 않았다. 대부분의 애니깽 이민 한인 후예들 가족사는 리 레혼씨 선조 스토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이민 조건이었던 4년간의 의무 노동기간을 끝내고 난 뒤였던 1910년을 전후해 한국은 일본에 국권을 빼았겨 이들에게 돌아갈 고국이 없어졌다. 남은 선택은 하루라도 빨리 멕시코에 적응해 살아남는 것밖에 없었다. 간혹 자녀들을 한인들끼리 결혼시킨 사람들도 있었지만, 워낙 작은 규모의 당시 이민 사회에서 그같은 커플은 오히려 소수가 됐다. 멕시칸들과의 결혼이 이어졌고 지금까지 100년이 넘어 내려온 ‘코리안 멕시칸’ 혈통이 만들어 졌다. 이민 3세대인 리 레혼씨는 “애니깽 노동자로 온 할아버지를 보지 못했지만 부친을 통해서 많이 들었다”며 “부친(1922년생, 작고)으로부터 어려서 한국에서 온 할아버지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고 말했다. 2남1녀를 둔 리 레혼씨는 이미 손주 손녀(이민 5세대) 넷을 둔 할아버지가 됐다. 그의 자녀들도 멕시코인들과 결혼했고 이미 혈통으로만 따지면 이민 100여년만에 한인 피 비율은 10% 정도 밖에 남지 않았다. “제사, 차례 같은 한국 전통 관례를 해본 적이 있느냐”는 질문에 라 레혼씨는 “없다”고 답했다. 그럼에도 “예전에 할아버지 집에서 사람들이 모여 이런 행사를 했다고 (아버지로부터) 들었다”고 설명했다. 여전히 그를 한인 후예로 붙잡아 두는 중요한 ‘연결고리’는 캐비지로 만들어 먹는 김치와 멕시코 시티 등에서 공수하는 된장, 고추장 등 한국 음식들이다. “이 음식들을 집에서 떨어지지 않고 먹고 있다”고 그는 말했다. 외모상 멕시칸이지만 한인 후예로서 살아가는 이들의 모습은 다른 후손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자신에게 ‘주어진’ 한국과의 인연을 놓치 않고 있었다. 개중에는 노예 생활을 하다시피 한 자신의 이민 선조를 자랑스럽게 생각하지 않는다. 현실적인 삶의 어려움 속에서 자기 조상이 한인인지 여부가 중요하지 않는 사람들도 물론 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리 레혼씨처럼 ‘코리안’ 혈통을 자부한다. 이들 한인 후예들이 조직한 ‘한인 이민 후손회’에서 한국말을 유창하게 구사하는 회원도 없다. 그럼에도 이들은 광복절등 한국의 큰 기념일에 모여 서로 친목을 도모하며 한국의 뿌리를 되살리고 있었다. #메리다의 제물포 거리 애니깽 선조가 고국을 그리워하며 모여 술을 나누고 회환을 푼 카페가 있었다는 제물포 거리를 가보았다. 인천 제물포는 이들이 탄 배가 고국을 떠나 멕시코로 출발한 곳이다. 이 건물 한 켠에 예전에 이들이 모였다는 카페가 있었고, 여기서 고향, 가족, 조국을 생각하며 눈시울을 적셨다고 한다. 이들이 하도 제물포, 제물포를 말하니 카페 주인이 카페 이름을 제물포라고 고쳤다는 스토리도 있다. 이미 100여년이 지나 그 자리는 다른 용도로 사용되고 있지만, 여전히 선조들의 눈물과 향취가 느껴진다. 제물포 거리 현판은 이민 100주년을 맞이해 지난 2007년 인천광역시에서 설치했다. 멕시코 메리다=송훈정 기자 [email protected]

2012-03-02

[애니깽 꼬레아노 (상) 나는 한인 후예] "멕시코 한인 자랑스럽다"…한인 이민 3세 올센 리

“어머니의 한인으로서의 당찬 자부심 잊지 못합니다”. 맥시코 애니깽 한인 이민 역사가 100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멕시코에는 한인들의 유산이 남아 흐르고 있다. 1905년 애니깽 한인 이민자들이 농장 지역 메리다(Merida)로 이동하기 위해 도착한 멕시코 프로그레소 항에 살고 있는 루이스 올란 올센 리(62 사진 왼쪽)씨가 대표적이다. 올센 리씨의 모친 이솔명씨는 그녀의 부모가 1905년 멕시코로 이주한지 2년만인 1907년에 이곳에서 태어났다. 애니깽 이민 2세대인 셈이다. 노르웨이 남편을 만난 이씨는 이후 마리아 빅토리아 리 가르시아란 이름으로 살았고 지난 1995년 향년 87세로 작고했다. 올센 리씨는 “나 자신을 노르웨이계로 생각해본 적이 거의 없다”며 어머니의 영향을 많이 받아 여전히 ‘코리안 멕시칸’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말했다. 오랫동안 한인 후손회 부회장을 맡고 있는 올센 리씨는 “어머니가 내 처에게 김치 등 한국 음식 만드는 법을 전수했다”며 “작고하신 할아버지와 모친의 한국 전통이 우리 부부와 자녀들을 통해서 계속 이어지고 있다”고 밝혔다. 그의 부인 마리아 아길라르 데 올센씨는 순수 멕시칸. 한인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그녀는 지금도 집에서 김치를 담가 먹는다. 시어머니 이솔명씨의 한국 음식 조리법을 멕시칸여성이 전수받은 셈이다. 그녀는 한발 더 나아가 수년전부터 한글까지 배워 지금은 매주 일요일 열리는 한글 학교에서 학생들도 가르치고 있다. 그녀는 자신의 이름을 직접 한글로 써보였다. 한글 학교에는 한인 후예들과 멕시칸 학생들 약 120명이 한글을 배우고 있다고 한다. 올센 리씨 부부의 자녀들도 한국 문화를 이어가고 있다. 그의 큰 딸 마리아(34)는 현재 메리다 시내에 있는 한인 이민 박물관에서 매주 어린 학생들에게 한국 무용을 가르치고, 둘째 딸 새이디(32)도 풍물을 배워 어린 학생들에게 전수하고 있다. 막내 케빈도 사물놀이를 하면 북을 친다. 특히 큰 딸 마리아는 한국춤을 인터넷 등을 보고 혼자 터득할 정도로 한국 문화에 대해 관심이 많다. 올센씨 부부는 “한인 후손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며 “계속해서 후세들에게 한글과 한국 문화를 가르칠 것”이라고 말한다. 멕시코 메리다=송훈정 기자

2012-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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